게임 엔진의 도시에서 자율 세계까지자율 세계, 스스로 규칙을 만드는 세계의 등장PART 1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그 안의 존재들이 알아서 살아가는 세계가 생겨나고 있다. 2024년 여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한 무대에서 나는 이 세계에 '자율 세계'라는 이름을 붙여 소개했다. 2년이 지난 지금 그때 무대에서 한 말을 다시 꺼내 정리한다. 그사이 절반쯤은 현실이 됐고,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오고 있는 중이다.
시리즈 안내 : 이 시리즈는 2024년 7월 7일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BIFAN+ 컨퍼런스에서 한 발표 "자율 세계의 등장과 새로운 창작 환경"을 2년 뒤에 1인칭으로 다시 정리한 것이다. 무대에서는 '자율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새로운 창작 문화'라는 표현을 가져와 이야기를 열었다. 이 글은 세 편 중 첫 번째다.
01무대에 서기 전에 들은 것
나는 건축과 디자인, 마케팅, IT를 오가며 창작을 해 왔다. 무대에 서던 무렵에는 직접 만드는 일보다, 영상과 게임과 서비스와 인프라처럼 기술과 창작이 겹치는 자리에 있는 팀과 기업에게 새로 열린 가능성을 소개하고 그것이 실제로 굴러가도록 돕는 쪽에 시간을 더 썼다. 몰입형 미디어와 인터랙티브 미디어에서 출발해 블록체인으로, 다시 AI로 탐색이 옮겨 갔고, AI는 그때 이미 영상 제작과 게임 쪽 실무에서 쓰고 있었다. 그날 나는 어려운 주제처럼 보이는 제목을 가져왔다고 먼저 털어놓았다. 자율 세계라는 말이 낯설게 들릴 수 있다는 단서도 달았다. 오토노머스 월드라는 개념이 그 무렵 새로 떠오르고 있었다.
컨퍼런스 첫째 날과 발표 당일, 나는 같은 무대의 다른 발표들을 틈틈이 들었다. 듣다 보니 이야기가 두 갈래로 나뉘고 있었다. 한쪽에는 새로운 기술을 실제 작업에 붙여 본 경험담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이 변화를 창작자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생존의 질문이 있었다. 한쪽이 도구를 살피는 이야기라면, 다른 쪽은 사람의 앞날을 걱정하는 이야기였다. 사회를 맡은 분은 내 앞 순서를 정리하며 AI 스타일이나 AI 장르 같은 것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말을 남겼다.
무대에 오르며 나는 내 자리를 조금 다른 곳에 두기로 했다. 도구를 살피기 전에, 그리고 창작자의 미래를 걱정하기 전에, 지금 무언가 새로운 존재가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먼저 직시하자는 것이었다. 스스로 살아가는 세계와 그 안의 존재들. 그것이 무엇인지부터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창작자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날의 순서를 셋으로 잡았다. 창작자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기술이 새로 만들어 낸 존재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둘이 뒤섞여 살아가게 될 자율 세계 안에서 창작자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이 시리즈 세 편이 그 순서를 따라간다.
변화의 성격을 어떻게 잡고 있었는지는 나중에 원고로 정리하면서 더 분명해졌다. 지금까지의 기술은 대체로 인간의 몸이 하던 일을 늘려 왔는데, 지금 벌어지는 변화는 지성과 창의성을 건드리고 나아가 현실과 가상을 가르던 선 자체를 다시 긋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선을 지우는 일에는 세 가지 기술이 각각 다른 몫을 맡고 있었다. 생성 AI는 상상한 것을 보여 주는 도구에서 스스로 이야기를 짓는 주체 쪽으로 넘어가는 중이었고, 현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디지털 트윈은 그 지능이 활동할 무대가 되었고, 블록체인은 그 위에 소유권과 신뢰라는 질서를 얹었다. 이 셋이 따로 놀지 않고 겹치기 시작한 자리에서 자율 세계라는 말이 나왔다.
02빨간 약과 파란 약
이야기는 익숙한 영화에서 시작했다. 무대 화면에 빨간색과 파란색 알약 두 개를 띄웠다. 매트릭스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뜻을 알아챘을 것이다. 1999년의 1편부터 이어진 트릴로지는 가상 세계에 대한 상상력의 원형 같은 작품이었고, 오랜 공백 끝에 2021년에 4편 'The Matrix: Resurrections'가 개봉했다. 3편으로부터 18년 만이었다. 흥행은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사실을 무대에서도 먼저 짚고 넘어갔다.
솔직한 소감도 같이 말했다. 18년 만에 다시 만난 매트릭스는 이전만큼의 임팩트가 없었다. 영화가 나빠져서가 아니라, 그사이 초현실적이던 설정들이 우리 일상 쪽으로 너무 가까이 와 버렸기 때문이다. 초월적 가상 세계라는 소재가 더는 상상의 영역이 아니게 됐다는 것. 영화의 감흥이 줄어든 자리에 현실의 실감이 들어와 있었다. 그래도 아직 안 본 사람이 있다면 한번 보시면 좋겠다는 말은 덧붙였다.
그 실감을 만든 것 중 하나가 게임 엔진이다. 영화 개봉에 맞춰 공개된 'The Matrix Awakens'는 언리얼 엔진 5로 만든 데모였는데, 영화의 연출 기법을 그대로 따르는 장면들이 사실은 전부 실시간 렌더링이었다. 촬영된 영상을 트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계산되어 그려지는 세계. 정해진 단방향 서사가 아니라 실시간으로 상호작용하는 스토리텔링이 가능해진 것이다.
무대에서는 실시간이라는 말을 두 가지 조작으로 보여 줬다. 카메라를 아무 데로나 옮겨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캐릭터를 움직이거나 총을 쏘면 그 세계의 사물들이 물리적으로 반응한다는 것. 영상이었다면 둘 다 되지 않는다. 이 방식은 그 무렵 이미 업계의 관행을 바꾸고 있었다. 언리얼 엔진은 게임을 넘어 영화와 광고와 공연에 들어가 있었고, 큰 비용과 시간을 들여 따로 제작하던 게임의 시네마틱과 컷신이 인게임 실시간 렌더링 쪽으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03살아 있는 도시
그 데모 안에는 거대한 도시가 통째로 들어 있었다. 도시를 걷는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과 도로를 달리는 차들은 누가 한 명씩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규칙 안에서 스스로 판단하며 움직이는 자율적인 개체들이었다. 지나가는 자동차를 가리키며 저 차 한 대 한 대가 각각 하나의 개체, 그러니까 엔티티(entity)라고 말했다. 다만 그 자율을 부풀리지는 않았다. 수준은 낮을 수 있지만 나름의 기능을 가지고 그 환경에 정의된 물리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정도라고 단서를 달았다. 시간과 날씨를 바꿀 수 있었고, 건물들은 몇 가지 규칙 안에서 생성되는 프로시저럴 디자인을 따라 무한히 만들어지고 변형될 수 있었다.

이 도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화면 왼쪽에 제작 명세로 붙어 있었다. 첫 줄이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이 도시를 53번 만들었다. 한 번 갈아엎는 데 두 시간, 후디니의 규칙 그래프로 전체를 다시 생성하는 데 25분. 그렇게 나온 도시에 인스턴스 800만 개, 건물 7,000채, 행인 35,000명, 차량 18,000대, 노상 가로등 27,848개, 교차로 1,248곳, 맨홀 12,422개가 들어갔다. 주차된 차 45,073대 중 38,146대는 실제로 몰 수 있다. 무대에서 내가 말한 10만 명은 서로 다른 얼굴로 생성된 모델의 수에 가깝고, 명세의 35,000명은 한 장면에서 동시에 걸어 다니는 수다. 층이 다른 숫자를 그날 나는 한데 뭉쳐 말했던 것 같다.

화면 오른쪽에는 그 행인들이 따르는 규칙표가 열려 있었다. 언리얼의 스테이트 트리라는 도구인데, 상태가 크게 둘로 갈린다. 평상시에는 주변 사물을 찾아가 사용하거나, 교차로에서 자리를 잡고 기다리거나, 목적 없이 배회하거나, 가만히 서 있는다. 그러다 위험 표시가 붙은 구역에 들어서면 반응 쪽으로 넘어가 도망칠 곳을 찾고, 장애물을 피하고, 맞으면 맞은 대로 반응한다. 도망 상태로 넘어가는 조건은 한 줄로 적혀 있었다. 지금 이 구역에 위험 태그가 붙어 있는가. 손으로 적어 넣은 것은 이런 조건과 상태의 목록이고, 3만 5천 명분의 걸음은 거기서 나온다.
프로시저럴 디자인의 이점은 그날 두 가지로 들었다. 하나는 문턱이다. 전문 모델링 기술도, 큰 장비도, 많은 인력과 비용도 없이 정해진 규칙 몇 개로 저런 공간이 생겨난다. 다른 하나는 경계다. 예전 게임이 미리 지어 둔 공간 안에 플레이어를 가둬 뒀다면, 이제는 플레이어가 가는 곳마다 거기에 맞는 환경이 새로 생겨나면서 공간 자체가 끝없이 늘어난다. 그리고 그 안에는 현실을 그대로 옮긴 물리 법칙을 걸 수도 있고, 현실과 아무 상관 없는 법칙을 새로 걸 수도 있다. 규칙을 다르게 정해도 된다는 이 한마디가 뒤에 나올 자율 세계라는 말의 바닥에 깔려 있다.
나는 이 대목이 이 이야기 전체의 씨앗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도시를 한 채씩 지어 넣는 대신 규칙을 정해 두면 도시가 스스로 자라나고, 행인들도 그 규칙 안에서 알아서 길을 건넌다. 창작자의 손이 닿는 자리가 사물에서 규칙으로 올라간 셈이다. 이때만 해도 이것은 그래픽 데모의 인상적인 기능이었다. 그런데 이 구조가 이후 몇 년 동안 여러 방향에서 반복해 나타난다. 2년 뒤 나는 아주 작은 규모로 같은 일을 직접 해 보게 되는데, 도시를 짓는 대신 도로 레이어를 한 겹 깔아 두고 그 위를 천 명 남짓한 인물들이 알아서 다니게 하는 식이었다.
04내 지갑 속의 단역 배우
그 도시의 얼굴들은 언리얼 엔진이 내놓은 메타휴먼이라는 도구로 만들어졌다. 이것을 굳이 소개한 이유는 품질보다 문턱 때문이었다. 높은 전문성이 없어도 누구나 버추얼 캐릭터를 만들어 쓸 수 있게 됐다는 것. 화면에는 편집기를 띄워 두고 얼굴과 피부, 머리카락과 수염, 체형과 옷까지 항목별로 고르는 과정을 보여 줬고, 표정과 모션도 리그 위에서 손쉽게 조절된다는 것을 이어서 보여 줬다. 그리고 앞 세션에서 나온 질문 하나에 그 자리에서 답을 붙였다. 디지털 배우가 등장하면 실제 배우는 계속 역할을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었는데, 나는 현실에서 이미 상당 부분이 이런 버추얼 캐릭터로 대체되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 세계에는 주인공만 있는 것이 아니다.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캐릭터가 있고, 그 곁을 스쳐 가는 무수한 NPC가 있다. 매트릭스의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는 영화 홍보의 하나로 이 단역들을 NFT로 만들어 팔았다. 메타휴먼으로 생성된 얼굴 하나하나가 고유한 소유물이 된 것이다. 판매 페이지를 열어 보면 판 것이 얼굴만은 아니었다는 게 드러난다. 컬렉션은 베이스 97,681개, 레드 42,060개, 블루 10,826개, 그리고 글리치라는 이름의 단 하나로 나뉘어 있었고, 화면 속 아바타들에는 개당 89달러의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왼쪽 필터 목록이 곧 이 단역들의 속성표다. 이름, 젠, 지혜, 직업, 해킹, 지능, 소셜 미디어 팔로워, 카리스마, 이동 수단, 손재주, 연봉, 완력. 스쳐 가는 행인에게 직업과 연봉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나도 하나를 샀다. 발표하던 그날에도 그 캐릭터는 내 블록체인 지갑에 들어 있었고, 나는 무대에서 그 사실을 공개하며 상상 하나를 보탰다. 내가 소유한 이 단역 배우가 다른 영화나 게임에 출연하고, 그 수익의 일부가 소유자인 나에게 돌아오는 시스템. 기술적으로는 그때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구조였다. 얼굴과 신원이 있는 디지털 존재가 소유되고, 출연하고, 정산되는 흐름. 배급사는 약간의 게임 요소 말고는 더 나아가지 않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소유 가능한 캐릭터가 하나의 IP이자 수익 모델로 자라날 가능성을 봤다.
이 상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적어도 NFT라는 경로로는 오지 않았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캐릭터 NFT의 유통 자체가 그 뒤로 쪼그라들었고, 그날 열어 보인 판매 페이지도 지금은 그 링크를 그대로 따라갈 수 없다. 다만 다른 쪽에서 같은 구조가 되살아났다. 그해 여름은 게임 부문 성우와 배우들이 AI 조항을 걸고 파업에 들어가던 무렵이기도 했는데, 그 뒤로 논점은 대체되느냐가 아니라 목소리와 형상을 쓰는 데 어떤 동의와 보상을 붙일 것이냐로 옮겨 앉았다. 소유된 디지털 존재가 어딘가에 출연하고 그 대가가 소유자에게 돌아가는 흐름은 지금 라이선스 계약이라는 껍데기로 굴러간다. 구조는 맞았고 레일이 바뀐 것 아닐까.
05대본 없는 배우
외형이 생기고 소유가 생겼으니, 다음 질문은 지능이었다. 무대에서는 이렇게 넘어갔다. 가상 세계가 점점 고도화되는 가운데 내가 주목하는 것은 지능을 갖춘 새로운 존재들이 그 안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그것을 부를 이름은 조심스럽게 골랐다. AI 기반의 버추얼 캐릭터, 조금 더 나아가면 버추얼 에이전트라는 표현을 써 볼 수 있겠다는 정도였다.
그 자리에서 소개한 Inworld는 AI 캐릭터를 만들어 주는 LLM 기반 솔루션이었다. 캐릭터의 외형에 성격과 배경 이야기를 텍스트로 입력하면, 그 설정대로 말하고 반응하는 NPC가 만들어진다. 미리 써 둔 대사를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대화를 생성하는 존재라서, 같은 질문에도 매번 조금씩 다른 답이 돌아온다.
이 회사가 그린 에이전트 구조도가 화면에 있었다. 세 덩어리다. 인지에는 성격, 배경, 기억, 목표, 감정이 들어간다. 지각에는 소리와 영상, 이벤트 트리거, 사물과의 상호작용, 햅틱 입력, 진행 신호가 들어간다. 행동에는 말과 몸짓, 사물 조작, 몸의 언어, 이동이 들어간다. 지금 우리가 에이전트라고 부르는 것의 설명이 2024년의 이 한 장에 거의 그대로 있다.

편집기도 열어 보였다. 탭이 성격, 지식과 인지, 목표, 장면, 안전, 장기 기억, 관계로 나뉘어 있고, 성격 항목에는 웃긴, 오만한, 마음이 따뜻한 같은 형용사를 넣으라는 예시가 떠 있다. 슬픔과 기쁨 사이, 분노와 두려움 사이, 공격성과 평온함 사이를 슬라이더로 밀어서 정한다. 오른쪽 배경 지식 칸에는 이 인물이 볼티모어의 한인 이민자 동네에서 자랐고 어릴 적 붙어 다닌 친구가 둘이었으며 커뮤니티 칼리지의 호스피탈리티 과정을 거쳐 스포츠 바에서 바텐더로 일했다는 이야기가 문단째 적혀 있었다. 무대에서 나는 이 작업을 소설을 쓰듯이 정의해 보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그렇게 쓴 인물이 에이전트 형태로 가공되어 손에 쥐어지면 그다음은 갖다 붙이는 일만 남는다.
도구로만 남아 있지도 않았다. 그해 6월 이 회사는 직접 만든 게임 데모를 스팀의 신작 축제에 내놓고 있었다. 모자 쓴 남자나 청소 로봇을 지목해 말을 걸라는 안내가 뜨고, 자막으로는 실험실에서 폭발이 있었고 아버지가 잔해에 깔렸을지 모른다는 말이 지나간다. 무엇을 캐묻느냐에 따라 사건의 윤곽이 달라지는 수사극이 그때 이미 플레이 가능한 물건으로 나와 있었다. 웹사이트에 가면 직접 다 해 볼 수 있다는 말을, 나는 그날 몇 번이나 반복했다.
Inworld의 코파운더 카일란 깁스(Kylan Gibbs)는 'Entertainment Is Getting an AI Upgrade'라는 TED 강연에서 '칼렙(Caleb)'이라는 AI 에이전트를 시연했다. 칼렙은 장난감이 널린 방바닥에 앉은 남자아이다. 화면에는 이 아이가 무엇을 받아들이고 있는지가 라벨로 떠 있었다. 소리, 시야, 사물, 맥락. 시연은 연출된 상황극이었지만, 참여자의 음성 대화에 맞춰 칼렙이 실시간으로 반응하며 장면을 끌고 갔다. 장난감 인형의 팔을 고치는 일을 두고 말이 오가고, 서로 이름을 묻는 대목도 있다. 정해진 분기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가 그 자리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무한 생성 스토리텔링이라고 불렀다. 대본이 있는 세계에서는 이야기의 총량이 대본의 두께로 정해지지만, 대본 없는 배우가 등장하면 이야기는 만나는 사람의 수만큼 생겨난다.

시연이 끝나고 나는 이런 것이 지금 이 자리, 그러니까 부천의 영화제 현장에 잘 어울릴 콘텐츠가 되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구조는 화면 안에만 갇혀 있지 않다. 가상 환경에 설정된 장면과 배경 지식이 한쪽에 있고, 마이크와 카메라와 센서를 통해 들어오는 현장의 입력값이 다른 쪽에 있어서, 이 둘이 서로 맞물린다. 현실에서 들어온 것이 가상의 존재를 움직이는 통로는 이때 이미 열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06스스로 살림을 꾸리는 캐릭터들
지능을 얻은 캐릭터에게 남은 것은 제 살림이다. 블록체인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투자와 자산부터 떠올리지만, 내가 주목한 것은 다른 쪽이었다. 블록체인은 거대한 네트워크이면서 데이터베이스이고 프로토콜이기도 하다. 그 여러 얼굴 가운데 내가 본 것은 계약, 약정, 거래 같은 신뢰 기반의 상호작용을 디지털 안에서 구현하는 스마트 컨트랙트였다. 그 성격 때문에 블록체인은 '월드 컴퓨터'라고 불리기도 한다. 세계 하나를 돌리는 데 필요한 규칙과 장부를 대신 맡아 주는 기계라는 뜻이다. 그날은 다른 말로도 한 번 더 설명했다. 현실 세계의 가치를 가상 세계 안으로 옮겨 놓을 수 있는 기술이라고.
무대에서 든 사례는 Echelon이라는 개발사가 만들고 있던 SF 스타일 IP 'Parallel'의 게임 'Colony'였다. 랜딩 페이지의 첫 줄은 소개라기보다 자기 규정에 가까웠다. 제목 위에 "세계 최초의 AI 게임", 제목 아래에 작은 글씨로 'Powered By OpenAI'. 이 세계의 캐릭터들은 하나하나가 NFT로 소유권이 부여되어 있고, 각자 자기 블록체인 지갑을 갖고 있다. 게임 안에서 광물을 캐면 토큰이 쌓이고, 캐릭터들끼리, 그리고 사람 유저와도 스마트 컨트랙트로 그것을 주고받는다. 나는 이들이 임무를 맡고 보상을 받으며 가상의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설명했다.
살림이라는 말은 은유가 아니다. 에이전트 하나의 화면을 열면 상단에 콜로니 이름과 아이디, 3일째 밤 10시 39분, 시스템 버전, 그리고 이곳에 사는 에이전트 열두 명이 적혀 있다. 아래는 네 칸으로 나뉜다. 아바타, 소지품, 상태, 활동 기록. 상태 칸의 눈금은 체력 100, 배고픔 39, 행복 68, 기력 72다. 활동 기록에는 밥을 사고, 광물을 캐고, 정련하고, 정련된 철을 집어 들고, 플라즈마를 거래하고, 물건을 만든 일이 차례로 완료 표시와 함께 남아 있다. 다른 화면에는 술집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수면 포드에서 낮잠을 잔 기록까지 있었다.

그리고 화면 한쪽에는 소유자에게 판단을 요청하는 카드가 떠 있었다. 더 좋은 채굴 장비를 사고 싶은데 돈을 더 벌 방법을 알려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아래에는 당신의 에이전트에게 말을 걸라는 입력창이 있다. 사람이 캐릭터에게 명령을 내리는 그림을 예상하고 열었는데, 캐릭터 쪽이 먼저 사람에게 묻고 있었다. 지능이 있고, 소유되고, 자기 재산으로 경제 활동을 하는 캐릭터. 셋이 한 몸에 모인 것이다. 사람의 손을 아주 놓아 버린 살림은 아니었지만, 손이 닿는 지점이 조작에서 상담 쪽으로 옮겨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와서 보면 이 화면에서 남은 것과 남지 않은 것이 갈린다. 캐릭터가 자기 지갑을 갖고 스스로 값을 치른다는 발상은 살아남았다. 반면 그 발상이 실험되던 'AI 게임'이라는 판 자체는 조용해졌다. 어떤 모델로 돌아가는지가 홍보 문구였다는 사실도 이제는 좀 낯설다. 랜딩 페이지 한가운데 자랑처럼 박혀 있던 그 한 줄은 지금 보면 갈아 끼우는 부품의 이름에 가깝다.
07자율 세계라는 이름
발표의 1장과 2장은 슬라이드 한 장으로 닫힌다. 검은 화면에 '자율 세계(Autonomous World, AW)' 한 줄, 그 아래 밑줄. 배경에는 방금 본 에이전트의 화면이 어둡게 깔려 있다. 개념 하나를 놓기 위해 장표 한 장을 통째로 비운 것이다. 웹3 블록체인 쪽에서 이 개념이 아주 빠르게 자라고 있다고 나는 말했다. 스스로 규칙을 세우고, 그 안의 존재들이 알아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세계. 기술의 측면에서도 독특하지만 나는 스토리텔링의 측면에서 더 독특한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세계관을 만드는 일과 세계를 만드는 일이 여기서 처음으로 같은 일이 되는 것 아닐까.

이 글을 다시 정리하는 2026년 여름의 시점에서 보면, 그때의 낯선 조합들은 이제 낯설지 않다. AI 에이전트라는 말은 그 2년 사이에 업계 용어에서 일상어가 됐고, 자기 지갑을 가진 에이전트가 값을 흥정하고 결제하는 구조는 이제 표준을 논의하는 단계까지 왔다. 대본 없는 배우들은 게임 밖으로 나와 온갖 서비스에 들어앉았다. 2024년의 무대에서 나는 이것들을 신기한 조짐으로 소개했는데, 지금은 그 조짐들이 바닥에 깔린 전제가 된 셈이다.
오지 않은 것도 하나 있다. 이름이다. 조심스럽게 꺼내던 버추얼 에이전트는 그냥 에이전트가 됐지만, 그날 화면 한가운데 밑줄까지 그어 놓았던 자율 세계라는 말은 산업의 어휘로 자리 잡지 못했다. 같은 실체를 지금은 AI 에이전트나 멀티에이전트, 에이전트 사회 같은 말로 부른다. 현상은 오는 동안 이름만 갈아탄 것인데, 이 시리즈의 제목이 그 말인 이상 그 사실도 같이 적어 두는 편이 맞겠다.
다만 그날 발표의 순서에는 이유가 있었다. 세계와 존재를 먼저 보여 준 것은, 그다음 질문이 거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가상에 갇혀 있지 않고 현실 쪽으로 계속 손을 뻗는다. 현실이 통째로 디지털로 복제되고, 그 위에서 에이전트들이 현실의 일을 대신하기 시작할 때, 가상 세계는 더 이상 현실의 보조 수단이 아니게 된다. 다음 편에서 그 이야기를 이어가겠다.